2015년 8월 19일 수요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1독서: 판관 9,6-15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1사무 12,12).>

복음: 마태 20,1-16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제목: 사람들이 촛불을 켜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라


희망은 위험합니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에 앞서 늘 실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망은 또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자꾸 미루면서 실망을 끝없이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입니다. 희망은 무수한 실망을 거치면서 정화되어 더 큰 희망으로 자라고,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일년 전 오늘, 여야가 세월호특별법 합의를 이룬 그날, 우리에겐 진상규명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일년 후 오늘, 세월호 진상규명의 의지가 거의 500일간 짓밟힌 지금, 우리에겐 정의에 대한 변함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세월호 시행령,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하고, 노벨평화상을 줘도 아깝지 않을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을 오히려 구속시킨 정부에게 절망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세월호 길거리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린다는 말엔 귀를 쫑긋 세워도,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태도엔 ‘아몰랑!’하는 일반서민들, 그리고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에 이성을 잃은 광인같은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여, 대한민국이 진짜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위대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신자인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지혜와 힘과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역사 정치 문화의 중심에 광화문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 정치 문화의 중심에는 스켐이 있었습니다. 오늘 들은 제1독서 판관기의 말씀은, 스켐 사람들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 9,6)라고 전합니다. 스켐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후 가나안에 처음으로 도착한 땅이었고, 여기서 하느님으로부터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창세 12,5-9 참조). 나중에 여호수아가 이 약속의 땅을 점령한 후, 다시 그곳 스켐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아놓고는 그들과 주님만을 섬기는 백성이 되겠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판관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런 판관들이 판관기에 열두 명이나 나옵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상, 이순신 장군상이 있는 것처럼, 판관들 중에서 기드온, 삼손 같은 이가 특히 유명했습니다. 모두 전쟁영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명한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스켐이라는 신성한 장소에서 왕으로 추대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볼 때는, 마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선포한 것과 비슷한 분위기같습니다. 태평성대를 가져다줄 것 같은 분위긴데 실상은 분단과 전쟁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판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기 외가 친척의 지지를 받고 스켐의 지주들이 밀어줘서 왕이 되긴 됐지만, 그 되는 과정에서 자기 친형제 70명을 학살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아비멜렉의 칼을 피해 살아난 막내동생 요탐이 스켐의 맞은편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서 나무들의 비유를 외칩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선거를, 아니 청을 합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세 나무, 즉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 위에 올라서는게 싫어서 왕좌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찌르고 괴롭히는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달라는 추대를 거절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시무시한 이런 말을 합니다: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이 우화의 내용처럼, 아비멜렉의 지지세력들이 나중에 아비멜렉이 맘에 안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칼에 찔려죽고 불에 타죽고 무자비하게 학살당합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와중에 자기도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을 머리에 맞고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판관 대신에 자기 지역 사람이라고, 또 자기 재산을 지켜줄 사람 같아서 왕으로 추대했다가 자기들의 목숨도 왕의 목숨도 모두 전쟁 속에 사라져간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고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형제와 동족의 생명을 앗아간 죄악의 결과였습니다.


아비멜렉의 역사는 그러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한채 끝없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의 길을 따르고자 하면서도, 행동은 이를 쟁취하기 위해 끝없이 편가르기를 하고 불의에 눈감고, 아니 불의를 적극적으로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모으고 쌓고 움켜쥐고 뺐는 데에 익숙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늘나라를 이해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하늘나라에는 자기가 생각했던 그런 정의와 평화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복음,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입니다.


복음의 포도밭 임자를 보면, 경제 개념이 좀 없어 보입니다. 포도밭을 가꾸려고 일꾼들을 사는 건지 일꾼들에게 생활비를 대주려고 포도밭을 경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충분히 나 모집해왔을 것 같은데, 아홉시에도 가보고 열두시와 오후 세 시에도 장터에 가봅니다. 가서보고 일자리를 못구한 사람들을 모두 자기 포도밭으로 가서 일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서는 아직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냅니다. 마치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면 내가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잖소’하며 발을 동동구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운좋게 그들도 포도밭에 지금 가봤자 일을 할 것도 없지만, 일단은 일꾼 명목으로 일하러 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을 하려했다는 마음만으로도 주인은 그에게 임금을 줍니다. 그 삯이 무려 하루종일 일한 사람의 임금이었던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정말 알아듣기 힘듭니다.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손해고, 일을 최대한 적게 해야 이득이 됩니다. 주인이 선하시니 어차피 모두 똑같이 주실텐데, 내가 왜 남보다 고생을 더 사서 해야되냐, 이런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일꾼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인의 이 선함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주인의 부르심으로 온 일꾼들이 늘어납니다. 나보다 세 시간 늦게 온 사람, 여섯 시간, 아홉 시간 늦게 온 사람, 심지어는 열한 시간 늦게 온 사람까지 있습니다. 주인은 저녁때가 되고 해가 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데 기뻐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자격없고 실망하고 있었을,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이라는 큰 선물을 줍니다. 앞에 열한 시간 일 못한 것을 면제해준 겁니다.


저는 이 비유가 세월호 진상규명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힌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광화문 광장 세월호 농성장 뿐 아니라, 국내 국외 곳곳에서 수많은 의인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정의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보기에 이른 아침부터 와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아홉시에도 오고, 열두시에도 오고, 세시에도 옵니다. 제각각 주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것이 시간별로 뜨뜨미지근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얄미운 사람은 하루종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오후 다섯 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진상규명이 될 겁니다. 그 때가 오후 다섯 시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누군가가 찾아 올 때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감사하고 끌어 안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뙤약볓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온 것이 남보다 더 고생을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더 큰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한자루 촛불을 켜라. 저는 여기에 한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켜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라. 내가 켜고 있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여러분 한명이라도 촛불이 끄지 않으면 그 한 촛불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수록, 오백일이 지나고 천일이 다가오면 올수록, 그것은 하느님의 실패가 아니고 하느님의 구원이 점점 다가왔다는 표징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에도 단 하나의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촛불이 저와 여기 와 있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분 마음 속에 촛불을 켜면 세상 모두가 알아봅니다. 하느님 나라가 저기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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