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화요일
1독서: 2베드 3,12-15ㄱ.17-18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제목: 데나리온과 사막의 지혜
1. 돈의 얼굴과 사막의 갈등
예수님 시대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데나리온’이라는 은전은 유다인들에게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의 부끄러운 역사였고,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어느 날 반대파들이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덫을 놓았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마르 12,14) 하고 물은 것입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의 배신자가 되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죄인이 되는 외통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게 하신 뒤,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이 말씀은 세상일과 신앙생활을 반반씩 적당히 타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권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깊은 말씀을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삶 속에서 실천한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4세기 무렵,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으로 떠나 숨어 살았던 ‘사막의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의 인기와 재산을 다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 찾으러 떠난 그들이었지만, 이 세상의 규칙과 의무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2. 환대라는 이름의 세속적 의무
사막의 수도자들은 오직 하느님 나라와 영적인 삶만을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삼았습니다. 복잡한 도시와 세상의 질서들은 구원의 길을 방해하지 않도록, 마치 중요한 시험공부를 할 때 스마트폰 알림을 잠시 꺼두는 것처럼 제쳐두고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하려 했습니다. 세상일에 ‘비행기 모드’를 켜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서 홀로 기도와 고행에 힘쓰던 그들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세상의 의무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길을 잃고 찾아온 ‘낯선 손님’이었습니다. 수도자들에게 엄격하게 밥을 굶는 단식과 밤낮으로 하는 기도는 하느님께 바쳐야 할 소중한 도리였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이웃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하던 단식을 끊고 기꺼이 불을 피워 따뜻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들의 지혜를 담은 기록인 《사막 교부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은 손님을 맞이해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대접하는 행동을 바로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주는 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떠난 뒤 다시 홀로 남아 기도와 고행에 집중하는 것을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로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치열하게 사랑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외로운 인간을 향한 사랑을 절대 저버리지 않는 따뜻한 지혜였습니다.
3. 일상의 자리에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세상의 규칙을 지키는 일과,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일 사이에서 자주 고민합니다.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을 기다리는 신앙인에게, 가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나 의무는 아무 의미 없는 귀찮은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막의 수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중요한 영적 방향을 알려줍니다. 옛날 사막에서 어떤 수도자는 "나는 음식을 절대 불에 익혀 먹지 않는다"며 대단한 고행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교부들은 그런 형제를 향해, 신앙을 핑계로 이웃을 외면하는 ‘영적 교만’이라며 따끔하게 꾸짖었습니다. 수도자들이 생각한 ‘황제의 것’은 하느님 나라에 비하면 작고 부차적인 영역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인간적인 사랑과 도리를 다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상의 의무였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생활, 가족과 친구 관계라는 삶의 의무를 귀찮다고 언제까지나 알림을 꺼둔 채 외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를 성실히 채우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평화로운 사람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