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십자가 현양 축일
1독서: 민수 21,4ㄴ-9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제목: 치유와 생명의 나무
1. 광야의 불평과 살려 주는 구리 뱀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결국 하느님께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라며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광야에 불 뱀들이 나타났습니다. 뱀의 독에 물려 사람들이 쓰러져 갔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뜻밖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고 전합니다.
구리 조각에 신기한 약효가 있어서 나은 것이 아닙니다. 뱀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려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믿음이 백성을 살려냈습니다.
2. 십자가, 수치에서 승리의 나무로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 사건의 참된 뜻을 직접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공관복음서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한 반면, 요한 복음서는 주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 ‘높여지실 것’을 선포합니다.
요한 신학에서 ‘올려짐’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가장 잔혹한 사형 도구였던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시는 굴욕의 순간이, 곧 세상을 이기시는 왕다운 영광과 승리의 때라는 거룩한 역설을 뜻합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바로 그 신비를 기리는 날입니다. 이 수치스러운 형틀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온 세상을 살려내는 ‘생명의 나무’이자 승리의 표징으로 바뀌었음을, 온 세상 앞에 높이 들어 올리는 날입니다.
3. 주님을 바라볼 때 살아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온갖 삶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죄와 상처의 독이 온몸에 퍼져 마음이 타들어 갈 때가 참 많습니다.
이 고통에서 살아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죄와 아픔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믿음과 회개의 눈으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벌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통해 우리를 살리려고 보내셨습니다. 기둥 위의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이 살아났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향해 믿음의 눈길을 올리며, 그분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굳세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