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0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7.9.17. 연중 제24주일                                                                  집회27,30-28,7 로마14,7-9 마태18,21-35



용서가 답이다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시도다.” 오늘 끊임없는 노래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닮는 지름길이 용서입니다.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 우리 마음도 비워지고 비워져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을 닮아갑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후렴과 오늘 아침성무일도 후렴도 똑같이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까지도 용서하여라.” 노래기도로 바쳤습니다.


‘용서가 답이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강론주제 ‘-답이다’의 시리즈가 재미있습니다. ‘월-사랑이 답이다’, ‘화-기도가 답이다’, ‘수-희망이 답이다’, ‘목-십자가가 답이다’, ‘금-비움이 답이다’, ‘토-실행이 답이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연중 제24주일 강론 주제는 ‘용서가 답이다’입니다. 


아마도 ‘-답이다’의 시리즈는 한없이 계속될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더불어 하느님의 진리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깨닫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여튼 ‘-답이다’의 시리즈가 많을수록 풍요로운 영적 삶일 것입니다.


1.용서가 답입니다. 

'살기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나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해 분노나 복수심을 지니고 살면 먼저 내가 다칩니다. 마음의 평화도 안정도 없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이 만병통치약입니다. 


분노와 진노는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인데 죄지은 사람이 이 것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웃을 때의 꽃같은 얼굴에 비하면 분노할 때의 얼굴은 얼마나 무서운지요. 똑같은 한 얼굴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그 좋았던 관계도 분노의 표출로 단번에 무너질 수 있고, 치유도 오래 걸립니다. 


분노는 불과 같습니다. 일거에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불같습니다. 용서의 사랑이 햇빛 같다면 분노는 온 산을 태워버리는 산불같습니다. 분노의 피해가 참으로 큽니다.


2.용서가 답입니다. 

주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납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십니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께 간청할 때 우리 죄도 없어집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야 어찌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감옥의 어둠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매일 평생 끊임없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사’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3.용서가 답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우선 내가 살기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되지 않아도 용서의 지향을 지니고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용서의 노력을 하다보면 은총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야 합니다.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사랑의 계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을 때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를 품고 죽는다면 그보다 큰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소개한 그 남편의 아름다운 임종어를 잊지 못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남편의 이 세마디 용서와 사랑의 고백에 쌓였던 앙금은 눈녹듯 사라지고 상처는 치유되고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매주 수요일 하루를 마치는 끝기도때 마다 다음 에페소서 말씀을 듣습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성난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 붙힐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계명을 기억하고, 자비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행복하고 감사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이웃에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자비하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웬만한 잘못을 눈감아 줘야 합니다.



4.용서가 답입니다. 

용서는 신적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부단히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매정한 종의 비유가 참 심오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보여줍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해준 주인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당시 화폐단위로 보면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이고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10000탈렌트의 빚의 탕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빚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처신은 얼마나 몰인정하고 무자비한지요. 배은망덕의 전형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10000탈렌트 탕감받은 빚에 비하여 100데나리온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정말 이 사람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몰랐고 은혜를 입은 자기를 몰랐던 참 무지의 인간, 탐욕의 인간이었습니다. 


이래서 하느님 자비를 공부해야 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평생공부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배우는 공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느님 자비를 배우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바로 그 모범생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회심후 평생 자기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산 바오로처럼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인색하고 무자비한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여 복음의 매정한 종은 주님의 가차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나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몰라서 ‘내것’이지 알고 보면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내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주님의 것을 나누는 것이 됩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자비롭게 합니다. 모든 세상 집착의 욕심에서 벗어나, 생사生死의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 푸른 가을 하늘에 흰구름처럼 초연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합니다.



5.용서가 답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래야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야 말로 마르지 않는 ‘용서의 샘’, ‘기쁨의 샘’, ‘감사의 샘’입니다. 


하여 수도공동생활을 하는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매일, 끊임없이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모든 분노와 증오, 미움과 원망, 불평, 불만등 온갖 부정적 어둠의 쓰레기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주님의 용서의 사랑으로 가득 채웁니다. 말그대로 텅 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기도해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용서를 통해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갑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짓지 않으면 하느님은 하실 일이 없어 실업자가 되십니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니라 죄를 짓더라도 즉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죄-회개-용서’의 여정을 통해 점점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너그럽고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갑니다. 남한테는 물론 나한테도 너그럽고 자비로워집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바로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무한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해가면서 우리는 저절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시며 용서에 항구할 수 있는 풍성한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시편36,8)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12 믿음의 힘 -하느님 중심의 삶-2018.6.23.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1 프란치스코 2018.06.23 108
3211 선물 인생 -삶은 선물이자 과제이다-2018.9.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1 프란치스코 2018.09.01 108
3210 “들어라!” -갈망, 깨어있음, 들음-2017.12.19. 화요일 12월19일 프란치스코 2017.12.19 108
3209 사랑뿐이 길이 없다 -사랑 예찬-2018.9.19.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프란치스코 2018.09.27 108
3208 하느님만 찾으며 -영적靈的혁명의 전사戰士로 삽시다-2019.11.28.연중 제34주간 목요일 1 프란치스코 2019.11.28 108
3207 온전한 삶 -삶의 중심을 잡읍시다-2020.1.14.연중 제1주간 화요일 1 프란치스코 2020.01.14 108
3206 영원한 젊음-젊음은 나이가 아닌 사랑-2020.3.7.사순 제1주간 토요일 1 프란치스코 2020.03.07 108
3205 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하느님 중심의 초연한 깨어 있는 삶-2020.9.9.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 프란치스코 2020.09.09 108
3204 하느님 사랑과 지혜의 신비 -기도와 회개, 경청과 환대-2020.10.2.연중 제26주간 금요일 1 프란치스코 2020.10.02 108
3203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고귀한 품위의 인간-2020.12.31.목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1 프란치스코 2020.12.31 108
3202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의 삶-2021.3.25.목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1 프란치스코 2021.03.25 108
3201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 -“건들이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2021.4.16.부활 제2주간 금요일 1 프란치스코 2021.04.16 108
3200 참 행복한 삶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 ​2021.6.5.토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5-754) 기념일 1 프란치스코 2021.06.05 108
3199 사랑밖엔 길이 없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새 계약의 일꾼인 우리들-2021.6.9.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 프란치스코 2021.06.09 108
3198 믿음의 여정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2024.4.9.화요일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2000-2016) 노트커 볼프 아빠스(1940.6.21.-2024.4.2.) 사도10,34-36.37ㄱ.42-43 요한5,24-29 프란치스코 2024.04.09 108
3197 누가 거룩한 사람인가? -지혜, 자비, 기도-2017.8.16.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2 프란치스코 2017.08.16 109
3196 거룩한 삶 -버림, 따름, 섬김-2018.5.29. 화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1 프란치스코 2018.05.29 109
3195 자기 발견 -주님과 만남의 여정-2018.9.6.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1 프란치스코 2018.09.06 109
3194 주님의 전사戰士 -믿음의 힘-2017.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프란치스코 2017.11.29 109
3193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 -찬양, 죽음, 탐욕-2018.9.24.월요일 한가위 프란치스코 2018.09.27 109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171 Next
/ 171
©2013 KSODESIGN.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