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3. 주님 공현 전 수요일                                                                                 1요한2,29-3,6 요한1,29-34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통한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목표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빛이신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닮아갈 때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답게 삽시다’ 추상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구체적 모델이 우리의 구세주로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입당송과 본기도가 세상의 빛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정체를 환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이사9,1)

“전능하신 하느님, 천상의 새 빛이신 구세주를 보내시어 세상을 구원하셨으니, 구원의 빛으로 언제나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본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구원의 빛으로 언제나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점차 주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자녀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세례받았다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수행을 통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 또한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닮아갈 때 하느님의 자녀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 원장과 주고 받은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개신교인 태광교회 신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한다 하여 문의해 보니 세광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태광교회 아닌가요?”

“아닙니다. 세상世上의 빛光이라 하여 세광世光교회랍니다.”


참 묘하게도 한참 뒤에야 '세상의 빛'인 세광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좋은 이름의 세광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 역시 세상의 빛이요 하느님 자녀의 모범입니다. 관상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의 신원을 한 눈에 알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별나게 눈에 띄는 말마디가 ‘봄見’입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잘 듣는 것’은 물론 ‘잘 보는 것’ 역시 영성생활에 절대적입니다. 마음따라 듣는 귀요 보는 눈이기에 마음이 깨끗해야 함이 우선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랑의 사람들이 마음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음이 깨끗하기에 잘 보고 잘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빛이 오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세상의 죄’라는 어둠에 대한 답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에 근거한 미사 때 영성체전 사제의 선언에 백인대장의 응답을 내 응답으로 하여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마디인지요.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의 죄를 없애주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살게 하고 주님을 닮게 합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어 마음이 오염될 때 그분을 뵐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두 번째 외침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요 예수님을 모심으로 그분과 하나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성화하여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성체성사가 없는 개신교가 참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길다싶지만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일급 책사인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드로 두긴의 통찰을 소개합니다.


“루터가 바티칸의 부정부패를 비판한 것은 백번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수도자들이 천오백년간 온축해온 인생의 비결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얕디얕은 인문주의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개 인간,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강등시키고 말았습니다. 구세주로서 부활의 기적을 기각시키고 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인간’을 부정하고 나면 인간의 변화, 즉 성화의 가능성이 차단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적 유토피아의 길 또한 봉쇄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윤리학과 정치학이 누락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의 위계를 타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는 역설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혼자 읽기만 하면 성령이 강림합니까? 영성은 독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수도해야 합니다.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을 성스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신학을 인문학의 하나로 전락시켰습니다. 하여 신앙을 영성의 차원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는 악령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신랄한 정곡을 찌르는 통찰인지요. 새삼 성체성사의 진가가 빛나고 2000년 가톨릭 수도영성의 전통과 역사가 빛납니다. 사도 요한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복직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그분을 닮아 그분처럼 되는 것이 우리 영적 삶의 궁극 희망이자 목표요 소원입니다. 이를 앞당겨 체험케해 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이런 희망을 두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방법은 언제나 끊임없는 기도와 수행으로 그분 사랑 과 진리 안에 머물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결입니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의 다음 통찰도 참 고무적이요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위대해진다 함은 부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수님처럼 고귀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함은 종속도 굴종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만 세속의 권력에 비굴해지지도 않는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과 독립성을 위해서라도 늘 하느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의 인간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개인’을 선언함으로써 ‘욕망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일생동안 소유하고 소비하는 양은 늘었는지 모르지만 영혼의 질質과 격格은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탈인간화, 포스트-휴먼을 운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성적 인간이 결국은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귀착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주는 죽비같은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잃으면 나도 잃습니다.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갈수록 우리는 참사람의 참나가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수행으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통해 진선미眞善美의 하느님을 닮아 갈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다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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