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9.연중 제3주간 금요일                                                       히브10,32-39 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기, 바라보고 지켜보기-

 

 

 

오늘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로 둘 다 하느님의 나라 비유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초미의 관심사이자 화두는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의 나라를 사신 삶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주님이 하느님의 나라이듯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어 가만히 관상의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절로 순리대로 전개되는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건들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뿐입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때가 될 때까지 한없이 마냥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이건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지극한 사랑과 겸손, 배려와 존중의 표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웃사랑이며 자녀교육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으로 내적힘의 내공이 대단한 이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섬세하고 민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묵묵히 하시는 일에 잘 협조해야하고 결코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참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이 큰병입니다. 기다리지 못해 참지 못해 손질과 잔소리의 입질로, 인내력의 결핍으로 일을 그르쳐 버리는 일을 얼마나 많은지요. 편리하고 빠르고 쉬운 것을 많이들 선호하니 불편하고 느리고 힘든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참 얕고 가벼운 천박淺薄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다 그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는 비약이나 도약은,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청사진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청사진대로 진행되는 역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카이로스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겸손이며 그 때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전에 산을 보며 써놨던 글이 생각납니다.

 

“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결코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공간을, 영역을 지켜주고 서로의 거리를 견뎌내는 공존의 평화가 평범한 듯 하지만 진짜 비범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의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도 이런 한결같은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지향합니다. 

 

하여 분도성인은 그의 규칙에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합니다. 진짜 정주의 수도승들이라면 기다림의 대가, 인내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도 형제가 7을 잘하고 3을 잘못한다면 3을 절대 지적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깰 수 있듯이 3을 교정하려다가 좋은 것 7까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면 결국 누구든 제자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때가 되어 스스로 깨달아 해야지 시켜서 강요에 의한 행위는 전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안으로부터 변해야지 마치 페인트칠처럼 겉만 번지르르해보여도 페인트칠이 벗겨지면 본래 모습 그대로인 경우와 흡사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29.

 

산처럼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쉽게 본능적으로 이해관계에 좌우됩니다. 인터넷, 휴대폰의 신속한 소통이 점점 기다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만히 멈추어 사색思索하기 보다는 인터넷 검색檢索하기에 바쁩니다. 이러다 보니 날로 다양한 중독 환자들이 늘어납니다. 관상적 기도와 침묵, 휴식이 참 절실한 때입니다. 어느 분의 비판에도 공감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마치 인간들이 다 증발해 버리고 아파트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사는 것 같은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전 국토에 이렇게 많이 짓고 때려 부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깨어 관상의 침묵중에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으로, 건들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때가 될 때까지 한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내공의 사람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가 묘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참으로 때의 필요와 요구에 적절히 사랑으로 음답하는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평화로이 함께하는 사랑, 함께하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랑, 인내하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한결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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