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1. 토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1696-1787) 기념일

                                                                                                                                                          레위25,1.8-17 마태14,1-12


                                                                                   희년禧年의 영성

                                                                 -하느님이 답이다. 다시 하느님께 희망을!-


하느님이 답입니다. 다시 하느님께 희망을 둬야 합니다. 오늘은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며칠 전 어둔 아침 식당 밖 환하게 피어나는 능소화를 보며 쓴 ‘희망의 꽃으로 살라고’라는 글입니다.


-늘/깨어/빛나는

 아름답고 고결한 ‘희망의 꽃’으로 

 살라고,

 날마다/새롭게/무수히

 끊임없이 피어나는

 능소화 꽃들/하느님의 선물이다.-


세상이나 주변 환경을 보면 때로 절망이지만 하느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샘솟는 희망과 기쁨입니다. 어제의 아름답고 고무적이었던 화답송 후렴이 다시 생각납니다.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시편81,2ㄱ).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할수록 하느님은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이 그토록 힘든 것은 하느님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살려니 그런 것입니다.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합니다. 북한을 다녀온 후 수권의 책을 낸,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은 재미교포 자매의 수상 소감 중 다음 대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말입니다. 금강산에서 만난  북녘의 아이들을 품안에 안고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던 말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만 부르거라. 저는 북녘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남과 북, 우리 겨레는 70년의 분단 세월동안, 생활의 양식만 달라졌을 뿐, 우리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한 공동체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남북을 바라보며 결코 평화통일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남북의 평화통일의 꿈도 실현될 것입니다. 참으로 냉혹한 국제환경속에서 남南과 북北 공히 유일한 구원의 활로活路는 통일뿐이며, 당장 통일은 아니라도 상호협력의 평화로운 공존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북한전문가와의 다음 대담 부분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대 전쟁 이전에는 만주로, 대륙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분단된 한국은 완전 섬나라죠. 일제 때보다 못한 섬나라. 당시는 만주 중심으로 대륙과 접촉하면서 동아시아적 시야를 갖고 있었으나 이젠 분단돼 완전히 미국만 바라보는 구조가 돼버렸어요. 따라서 시야가 더 좁아지고 사상적으로도 협소해졌어요.”


새삼 우리의 현실을 깊이 바라보게 하는 내용의 통찰입니다. 이래서 남북통일이 절실합니다. 남북이 분단되니 삼면인 바다에 완전 고립된 상태로 위로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섬나라 같은 우리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나라만 그런게 아니라, 디지털 소통의 시대라 하지만 극도의 개인주의적 생존경쟁의 환경 안에서의 사람들 역시 고립된 외로운 섬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하느님이 답입니다. 다시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우리의 마음도 순수純粹지고 시야視野도 넓어 집니다. 다시 예전 나눴던 시가 생각이 납니다. 여기서 하늘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마음을 들어 올린다

 온갖 생각들/하늘 구름에 띄워 보낸다

 마음은/다시/희망의 푸른 하늘이 된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 예언자의 죽음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순교라 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할 때 마다 마음은 늘 유쾌하지 못합니다. 분위기도 어둡고 나오는 인물들, 즉 헤로데, 헤로디. 그의 딸 살로메 모두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이 어둠중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춰옵니다. 믿음의 눈을 지녀야만 하느님 주시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복음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하느님이 예비하신 세례자 요한에 이은 ‘희망의 주자走者’ 예수님의 등장입니다. 요셉수도원으로 말하면 제 바톤을 이어 받은 빠코미오 원장 수사가 힘껏 달리며 하느님 희망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 1독서는 어제 이스라엘 축일들의 소개에 이어 희년에 대해 소개합니다. 희년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희망의 빛입니다. 오늘 1독서를 통해 50년째 희년을 맞이하여 3차원에 걸쳐 이뤄지는 해방이 신선한 충격이요 영감입니다.


즉 희년의 목표는 1.인간해방(human liberation;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25.10)’, 2.경제적 해방(economic liberation;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레위25,13)’, 3.생태적 해방(ecological liberation;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레위25,11). 바로 이것이 희년의 영성입니다. 전 우주적 해방의 희년을 꿈꾸는 해방자,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신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로 착취되고 망가져 가는 생태적 환경에서, 불평등의 경제적 상태를,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지요. 학자들은 과연 희년이 실제 이스라엘에서 적용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히 실현될 그 날을 상징함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 역시 궁극엔 이런 전우주적 차원 까지의 해방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희망을 두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며 당신 해방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25,17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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