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5.금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1821-1846) 기념미사

역대하24,18-22 로마5,1-5 마태10,17-22

 

 

 

순교 영성

-기쁨, 희망, 평화-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재작년 까지는 대축일로 지내다가 작년부터는 9.20일 대축일과 중복되기에 신심미사로 대치되어 오늘은 보통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하여 루시아 수녀님께 문의했습니다.

 

“내일 순교자 기념미사입니까? 혹은 연중기간 미사입니까?”

“순교복자 수녀회인데요. 순교자 기념미사를 봉헌해 주세요.”

 

수녀님의 지체없는 대답에 공감하고 즉시 순교자 기념미사를 위한 말씀 묵상에 들어갔습니다. 순교성인들을 포함해 모든 성인들은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며 보물입니다. 교회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며 교회 하늘은 물론 세상을 환히 밝히는 별같은 존재들이 성인들입니다.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같은 성인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 삶의 좌표가 삶의 지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저는 성인 축일을 대할 때마다 어김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생몰연대와 제 나이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저보다 적게 사셨나 혹은 많이 사셨나 비교해 보며 삶을 추스립니다. 회개하기도 하고 분발하기도 하고 삶의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만25세에 순교하셨으니 저는 성인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습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사느냐?’의 삶의 양이 아닌 ‘어떻게 잘 사느냐?’의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 보게 됩니다.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라는 탄식을 간혹 듣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히 ‘하느님이 우리 미래이자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미래이자 희망이라 고백한다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을 ‘순교 영성’이라 나름대로 정하고 세부 항목으로는 기쁨, 희망, 평화로 정했습니다. 

 

어제 지인이 보내준 카톡 메시지 ‘요양병원과 요양원’에 관한 내용이 많은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노년의 인생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양병원과 요양원; 오늘도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창살없는 감옥에서 의미없는 삶을 연명하며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도 자신의 말로가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두고 보면 안다.

 

그래도 어쩌랴! 내 정신 가지고 사는 동안에라도 맛있는 것 먹고, 가고 싶은 곳 가보고, 보고 싶은 것 보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야지! 기적같은 세상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삶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하느님도 기도도 통째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고,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연 나도 저렇게 품위있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고 싶다할 정도로 내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어른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 하느님 중심이, 의미가 실종될 때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인생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말씀과 기도로 평소 영혼을 잘 보살펴 튼튼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위에서는 이런 처방이 없고 오로지 현세에서의 육신 욕망의 충족만이 전부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저는 오늘의 순교 영성에서 찾았습니다. 기쁨과 희망, 평화의 순교 영성이 답입니다.

 

첫째, 기쁨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쁨입니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기쁨은 신자생활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과 고통중에도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바로 회개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서 하느님을 만날 때 기쁨의 선물이요 참 나의 회복입니다. 회개없이는 겸손도 기쁨도 없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요아스 임금을 비롯한 대신들 무지로 인해 우상들을 섬기고 하느님의 사람, 즈카르야를 살해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즈카르야의 예언입니다. 하느님을 잊음이, 하느님을 배반함이 불행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 우리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을 만날 때 기쁨입니다. 고통과 시련중에도 샘솟는 선물같은 기쁨이요, 순교성인들의 삶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둘째, 희망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지옥의 입구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릴지어다” 쓰여져 있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차게 살아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참 고맙게도 신망애, 믿음-희망-사랑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마음 안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여기서 샘솟는 희망이 모든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게 합니다. 결코 이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생생한 희망을 가진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오로의 확신에 넘친 고백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희망의 백절불굴의 원천이요 기쁨과 더불어 순교영성의 핵심입니다.

 

셋째, 평화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남북미 정상간의 만남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뿌리 내리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문제는 일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일본에는 반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일본과의 평화가 큰 숙제입니다. 지금 일본과 무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갈등과 불화, 분열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한일간의 갈등과 불화, 분열, 그리고 남남 갈등과 불화, 분열입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이 한일간의, 남남의, 남북간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중재자로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정말 큽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박해의 곤경중에도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가 우리를 참으로 평화롭게 합니다. 갈등과 불화, 분열의 현실중에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음은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신 깊은 평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순교영성의 기쁨이, 희망이, 평화가 끝까지 견뎌내어 우리 모두 구원받게 합니다. 미사중 주님의 기도후, 영성체전 주님 평화의 선물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쁨과 희망, 평화의 순교 영성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순교영성의 요약과도 같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
    고안젤로 2019.07.05 08:08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순교영성의 기쁨이, 희망이, 평화가 끝까지 견뎌내어 우리 모두 구원받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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