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4.연중 제5주일                                          욥7,1-4.6-7 1코린9,16-19.22-23 마르1,29-39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우리나이로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결같은 열정적인 사목자로의 청년같은 모습은 늘 신선한 감격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늘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교황님에게 참 놀라운 것은 사적인 시간이 없이 늘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적인 시간이라는 것이며 날마다 찾는 모든 이들에게 참 적절한 삶의 지침이 될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그의 백성들을 섬겨라.”

교황님을 방문한 스페인의 마드리드 교구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연인들이 되고 변화에 마음을 열라.”

역시 교황님을 만난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새벽 카톡을 열어보니 수도원에 피정왔다가 갑작스런 대모의 죽음으로 장례미사차 돌아간 자매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주었다는 위로의 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 선종하신 대모님, 하늘나라 가는 길 많은 교우분들과 잘 바래다 드리고 왔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때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으니까요.

잠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건너감이듯,

죽음은 우리의 시간에서 

하느님의 영원으로 옮아가는 건너감이지요.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영원까지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 손 꼭 잡고,

오늘도 빛과 생명을 활짝 피우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인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2024.2.4.21쪽 하단부) 두 기사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1월24일 서품 받은 살레시오회 세 사제와 한 부제의 사진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1월28일 향년 43세로 선종한 서울 대교구의 젊은 사제의 사진과 더불어 1월31일 명동대성당에서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참으로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때때로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온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살 날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실뿐 결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그러니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행이 아닌 행복을, 

어둠이 아닌 빛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신,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결연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의 샘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요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전사로서 삶의 현장에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전사란 말마디가 적절하고 좋아 전사란 말마디를 씁니다. 오늘부터 파스카의 봄의 전사로 살라하여 입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분위기가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입니다. 희망이 빛살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이런 극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욥의 실감나는 적나라한 넋두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날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가는 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같은 현실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곳이 지옥입니다. 이런 절망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결연한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화답송 시편을, 제1독서의 바오로를, 복음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로, 예수님과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무지와 허무,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쳐주신다.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미를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니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네.”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의 하느님 찬미의 찬란한 빛이 지옥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니 욥의 절망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의 희망과 기쁨을 선택해 찬미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처럼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얼마나 멋집니까! 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무리 주님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욥을 선택하지 마시고 참으로 멋진 주님의 용사 바오로를 선택하세요.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니 욥이 아니라 복음의 전사, 바오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생명을 주는 복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복음,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복음, 신망애의 삶을 살게하는 복음,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좋은 복음입니까! 새삼 예수님 자체가 참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삶을 삽니까? 바로 오늘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얼마나 영적전투치열한 예수님 하루하루의 삶인지요! 지칠줄 모르는 예수님의 열정이 놀랍습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이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 안의 마귀를 쫓아내실 분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모두인 예수님뿐입니다. 복음 선포에 저절로 따라 오는 치유이적이요 구마이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복음 선포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생기를 잃고 빛을 잃고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지요. 병든 이들도 많고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영적건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답은 복음선포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 모두가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선포의 원천은, 분별력의 지혜의 원천은, 이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기도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찬미기도와 더불어 외딴곳에서의 개인 관상기도도 필수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의 밤기도였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외딴곳에서의 깊은 관상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키고 사명감을 새롭게 확인한후, 다시 홀가분하게 성과에 집착하거나 “모두 스승님을 찾는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 선포에 여정에 오른 예수님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서 얼마나 복음 선포의 사명감에 충일한 예수님의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올해를 기도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님처럼 복음선포의 전사가, 복음의 전사가, 기도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외딴곳 성전에서 거행되는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당신의 일당백의 주님의 영적전사,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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