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7.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107) 기념일

로마1,16-25 루카11,37-41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예수님이 궁극의 답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이며

 굳건히 이룩하신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편8,4-5)

 

오랜만에 가을밤 하늘에 선명한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 지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사람이 하느님의 관상가입니다. 그동안 강론에서 참 많이 다뤘던 주제가 무지입니다.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부정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무지의 힘도 참 막강합니다.

 

평화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잔인하고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문명시대라하지만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야만시대입니다. 그리하여 죄도 많고 병도 많고 사람들도 날로 사악해지는듯 합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참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탐욕, 분노, 잔인함, 폭력, 보복, 질투, 교만, 허영, 어리석음 등 그 뿌리에는 무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궁극엔 무지에서 기인하는 병이요 죄요 악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반복하여 나눴던 “행복하여라”로 시작된 참행복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봤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입증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똑똑한 듯 하나 실로 어리석은, 헛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입니다.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지혜는 없었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렸습니다.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본말전도, 주객전도, 표리부동의 위선적 사람들입니다. 안팎이 같은 진실함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혜와 사랑이 결핍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자 깜짝 놀라는 어느 바리사이입니다. 손을 씻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잊을 수도 있습니다. 관행이라 하지만 결벽증 환자가 아니라면 그리 놀랄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이 정곡을 찌릅니다. 이들의 무지와 위선을 폭로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같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말씀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를 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탐욕과 사악의 무지한 인간들, 또한 부정적 인간현실입니다. 만인의 참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이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아무리 위장해도 속은 저절로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자선을 통해 속을 비워내면 저절로 속은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선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을수록 속은 비워지고 깨끗해지기 마련이요 겉 역시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지혜와 사랑의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비단 자선뿐 아니라 모든 선행과 사랑의 수행 역시 속을 비워 겉과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런 안팎이 같은 진실한 사람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숨긴 것이 없는 투명한 삶이니 하늘을 우러러 두려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불안할 것도 없고, 또 세상 어느 것들에도 소유되어 노예된 삶이 아니니 참으로 자유롭고 넉넉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행복한 삶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초한 대부분 불행이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저절로 따라 오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복음의 힘’과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라는 두 소주제로 이뤄졌습니다. 복음의 힘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이를 하나로 종합한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유롭고 행복하고 부요하게 하는 복음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열화와 같은 강론은 인간 무지에 대한 지탄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입니다.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 달린 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꿨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입니다. 아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혜와 사랑의 하느님 자리에 우상들을 둔 참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은 여전히 오늘도 계속됩니다. 무지의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이 참 사랑과 지혜의 증인들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도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107년경 순교한 사도교부로 성 요한 사도의 제자이자 성 뽈리카르보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일치의 박사”인 성인입니다. 그가 로마로 압송될 때 보낸 7통의 주옥같은 편지중 감동적인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순교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인은 같은 편지에서 순교의 고통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새생명이 태어나듯이 순교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된다 해서 순교한 날을 “천상탄일”의 축일로 지내는 전통도 성 이냐시오로부터 기인합니다. 

 

참으로 무지에 답은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자 예수님과 일치를 이뤘던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행위로서 마지막 숨까지 성녀의 입술위에 늘 있었다. 성녀는 그의 방앞에 써붙였다. ‘예수님은 내 단 하나의 사랑이시다(Jesus is my one love)’.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8.16)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었다.”

 

무지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일치의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과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행복한 참나의 하느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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