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5.12.30. 수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1요한2,12-17 루카2,36-40


                                                                   정주(定住)의 축복


오늘은 ‘정주의 축복’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정주자체가 축복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는 진정 ‘정주의 사람’이자 ‘축복의 사람’입니다. 절집(寺刹)의 두 큰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합니다. 한나같은 노성녀老聖女는 진정 하느님의 집인 교회의 큰 자산임을 깨닫습니다.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입니다. 마침내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성전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진정 정주할 곳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중심안에 정주할 때 지나는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덧없는 세상 것들로부터 초연할 수 있습니다. 정주의 중심을 잃을 때 혼란이요 방황입니다.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우리 모두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 안에 정주할 때 비로소 세상 것들에 초연할 수 있으며 집착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집착할 때 세상 것들부터 저절로 이탈하게 됨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서도 세상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새삼 하느님 안에 정주하여 하느님을 사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주하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라는 하이덱거 철학자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정주하지 못함을 묘사한 말입니다. 


정주하지 못할 때 하느님도 나도 모르니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말씀도 멈추어 정주할 때 하느님을 알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여 분도수도원의 으뜸 서원도 ‘정주(stability) 서원’입니다. 오래전의 ‘호수’라는 애송 자작시도 생각이 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정주의 마음 호수위에 가득 담기는 하느님의 얼굴인 하늘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의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나자렛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정주처定住處입니다. 막연한 정주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가시적 중심의 정주처가 중요합니다. 한나의 가시적 정주처가 성전이었다면 예수님의 성장과정중의 가시적 정주처는 나자렛이었습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입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어머니의 품같은 자연이라는 가시적 중심의 고향이라는 정주처가 있었는데 오늘날 이런 정주처들은 대부분 사라져 감으로 사람들 역시 많이 거칠어지고 사나워졌습니다. 정주처의 손실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지나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남습니다. 세월의 격랑에, 욕망의 격랑에 휘말리지 않고, 허무주의에 침몰하지 않고 늘 안정과 평화를 누립니다. 


바로 오늘 지금 내 몸담고 있는 여기가 정주처이자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한나의 성전과 같은 곳이자 성장기 예수님의 나자렛 같은 곳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해 줍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98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연민, 기도, 순종-2018.12.18.대림 제3주간 화요일 1 프란치스코 2018.12.18 182
1997 믿음이 답이다 -간절하고 겸손한 기도와 믿음-2017.9.18.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1 프란치스코 2017.09.18 182
1996 빛의 자녀답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2017.3.26. 사순 제4주일 사무상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5,8-14 요한9,1-41 프란치스코 2017.03.26 182
1995 백제의 미소 -고향순례- 이사26,7-9.12.16-19 마태11,28-30 프란치스코 2016.07.14 182
1994 희망의 여정 -영원한 희망의 도반道伴이신 주 예수님-2022.7.16.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프란치스코 2022.07.16 181
1993 성인이 됩시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2022.6.29.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낮미사 프란치스코 2022.06.29 181
1992 선교활동의 본질적 요소 -성령과 환대-2022.5.23.부활 제6주간 월요일 프란치스코 2022.05.23 181
1991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 믿음, 예수님 따름, 예수님 닮음-2022.4.5.사순 제5주간 화요일 프란치스코 2022.04.05 181
1990 삶의 중심인 하느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2022.3.30.사순 제4주간 수요일 프란치스코 2022.03.30 181
1989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 -성체성사의 가르침-2022.2.12.연중 제5주간 토요일 1 프란치스코 2022.02.12 181
198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파스카의 꽃’같은 삶-2021.9.3.금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540-604) 축일 1 프란치스코 2021.09.03 181
1987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제자와 사도로서의 삶 -기도가 답이다-2019.9.10.연중 제23주간 화요일 1 프란치스코 2019.09.10 181
1986 영원한 삶 -사랑과 신뢰의 관계-2019.8.29.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1 프란치스코 2019.08.29 181
1985 사랑과 ‘마음의 순수’ -사랑이 답이다-2019.6.13.목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1195-1231) 기념일 1 프란치스코 2019.06.13 181
1984 끊임없는 기도가 회개가 용서가 자비가 답이다 -주님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삶-2019.3.26. 사순 제3주간 화요일 1 프란치스코 2019.03.26 181
1983 큰 산, 큰 사랑, 큰 사람 -하느님 중심의 삶-2019.2.3.연중 제4주일 1 프란치스코 2019.02.03 181
1982 주님 성탄의 기쁨 -영광과 평화-2018.12.25. 주님 성탄 대축일(밤미사) 독서기도(성경독서) 이사11,1-10. 교부독서:레오 대교황의 성탄강론 이사9,1-6 티토2,11-14 루카2,1-14 프란치스코 2018.12.24 181
1981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발견과 확인-2018.4.3.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1 프란치스코 2018.04.03 181
1980 대림待臨의 기쁨-내적혁명-2016.12.11.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프란치스코 2016.12.11 181
1979 기품氣稟 있는 삶-주님의 종-2016.11.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프란치스코 2016.11.08 181
Board Pagination Prev 1 ...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 172 Next
/ 172
©2013 KSODESIGN.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