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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11. 연중 제24주일                                                  탈출32,7-11.13-14  1티모1,12-17 루카15,1-32


                                                                     자비하신 하느님의 기쁨


저에게 하루하루 쓰는 강론은 첩첩산중疊疊山中 날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날마다 말씀으로 하얀 대리석 위에 무딘 끌을 사용하여 우직하게 주님의 모습을 조각彫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여 새벽 주일 강론을 마친 후 십자가의 자비로운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저절로 솟아난 고백은 다음 셋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찬미합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여전히 동심童心의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거칠고 억세 보이던 나이 지긋한 형제분들도 고백성사 시 흐느끼는 것을 보면 저절로 감동하게 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착한 어린이’임을 깨닫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외관外觀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전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더라면 자살을 해도 여러번 했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자살을 대죄로 철저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고백성사 때는 흡사 회개하여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있는 순수한 모습입니다. 얼마전 수도원을 잠시 방문했던 한 수도형제의 스치듯 무심코 던진 말에도 위로와 더불어 감동했습니다. 나이에 관계 없이 평상시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던 형제였습니다.


“어깨도 예전같지 않고, 눈도 희귀병이라 하여 한 달에 한 번 비싼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할 수 없지요. 그냥 받아 들이고 살아야죠.”


너무나 평화롭고 담담한 어조로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야죠’라는 말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모두를 내어 맡기는 믿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백성사를 본 분도 그 많은 어려움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사는 형제였습니다. 


형제자매분들 하나하나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면, 대부분 남을 탓함도 원망도 없이 담담히 삶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아픔과 병을 받아들이고 사는 감동적인 모습들입니다. 답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여 무거운 모든 짐을 맡기고 사는 믿음’ 하나뿐임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자비하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주님께 평화와 위로, 기쁨의 선물을 받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방금 불렀던 화답송 후렴에서, 오늘 복음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회개하여 돌아 온 작은 아들처럼, 회개하여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요즘 자비의 희년 중에 널리 회자되는 단어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단 하나는 우리 모두가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기쁨은 무엇이며 하느님의 이 기쁨에 참여하는 길은 무엇이겠나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에서 찾아냈습니다. 모세는 기도의 대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사랑이며 소통이며 대화이며 숨통이요 생명입니다. 말그대로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하여 하느님을 만나야 영혼도 육신도 삽니다. 기도해야 하느님과의 깊은 신뢰의 사랑관계가 이루어 집니다. 오늘 탈출기를 보면 하느님의 모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망하여 진노한 하느님께서 그 답답함을 모세에게 털어 놓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느님의 유일한 파트너, 모세가 없었더라면 하느님도 참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모세를 신뢰하여 속내를 다 털어놓은 하느님을 바로 잡아 주는 모세의 간절한 애원의 기도입니다. 모세는 결코 혼자 살려는 이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는 모세의 기도가 감동적이라 그대로 전부 인용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을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하며 약속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 모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과연 이웃을 위해 이런 간절한 중재기도를 바친 적이 있는지요. 주님께서는 모세의 중재기도에 마음을 바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모세의 중재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고, 그 유명한 모니카 성녀 어머니의 끝없는 눈물의 중재기도가 아오스팅을 구원의 회개로 이끌어 대 성인이 되게 하였음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음도 무수한 분들의 간절한 중재기도 덕분임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 또한 곤궁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그 아픔에 동참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찬미와 감사의 기도임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을 위해 바치는 우리의 중재기도에 속합니다.


둘째, 감사입니다.

오늘 제2독서 티모테오 1서의 바오로에게서 찾아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감사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믿는 이들의 영성의 표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라는 바오로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감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은총의 선물이듯 모두가 감사입니다. 매사 감사할 때 하느님의 축복이자 겸손이요,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입니다. 아니 감사 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며 운명을 바꿉니다. 


오늘 제 2독서 티모테오 1서는 구구절절 바오로의 감동적인 감사의 고백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해 감사하는 바오로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 흘렀습니다.”


첫째가는 죄인인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거듭 감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시간되시면 지금까지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묵상하며 감사의 목록을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하루를 마치면서 하느님 베풀어 주신 감사했던 일들을 적어보셔도 영적 진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주, 아니 끊임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바치길 강력히 권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가장 애용하는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느님의 자비에 늘 감사하는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에게서 찾아냈습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내 삶의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평범한 일상의 회개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제자리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기에 앞서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비유 중 첫째, ‘되찾은 양의 비유’나 둘째, ‘되찾은 은전의 비유’는 잃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잃었던 사람을 되찾았을 때의 하느님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잃었던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들어납니다. 잃은 사람을 찾는, 잃은 사람을 기다리는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다면 지체할 수 없는 회개입니다. 오늘 삶의 밑바닥 극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생각한 작은 아들의 회개 과정도 감동적입니다.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의 기도같은 고백입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말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환히 계시되는 자비의 복음입니다. 가엾은 마음에 회개하여 돌아오는 작은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환호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거지가 되였던 작은 아들이 회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남으로 아버지의 자녀로서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완전히 회복한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이어 벌어진 기쁨의 잔치는 흡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를 잊고 살다가 회개하여 아버지가 마련하신 미사잔치에 참여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개의 차례는 큰 아들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자비를 망각한 큰 아들의 불평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처사도 감동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단다.”


큰 아들의 회개를 호소하는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란 말을, ‘너의 저 아우’로 정정하시며 형제간의 우애를 상기시키는 배려 깊은 아버지입니다. 세상에 어느 종교에 이런 자비의 복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같은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의 말로 끝나고 큰 아들이 반응이 생략되었지만, 아마 회개하여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동생 맞이 기쁨의 잔치에 분명 참여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24주일 우리에게 자비하신 ‘하느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1. 기도하십시오.
  2. 감사하시시오.
  3. 회개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회개하여 당신의 이 거룩한 기쁨의 미사잔치에 동참同參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 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시편3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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