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8.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욥기1,6-22 루카9,46-50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예수님과 욥-
오늘부터 시작되어 토요일로 끝나는 제1독서 욥기가 반갑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예표처럼 느껴지는 욥이요, 두분의 믿음이 공통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 예수님과 욥이요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처럼 두 분 다 하느님의 종이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인물이 욥입니다. 무죄하고 의로운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략된 첫머리 부분이 아름답고 참고가 되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그 사람 욥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종들도 많았다. 그 사람은 동방인들 가운데서 가장 큰 부자였다.”
설화상 인물이지만 실화의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오염되거나 중독되지 않고 참으로 겸손하고 초연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탄과의 대화중에 확인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정한 욥이었습니다. 사탄은 창세기 하와를 유혹하던 뱀같지만 하느님의 수중에 있음을 봅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우리보다 우리를 환히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며 세상 누가 뭐라든 요지부동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허락이 떨어짐으로 사탄에 의한 욥의 시련과 고난이 시작됩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본 훼퍼의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네 차례 반복되어 전해진 불행의 소식입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이어지는 욥의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일체의 불평이나 원망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즉시 일어나 통회의 자세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셔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참으로 순수하고 놀라운 믿음이자 겸손의 극치요, 이런 불행의 극한 상황에서도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의 믿음을, 찬미의 힘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평소 믿음을 반영합니다. 한결같이 ‘1.하느님을 경외하며 2.악을 멀리하고 3.올곧고 4.흠없이 살아 온 믿음 생활’의 반영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욥의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하느님의 종 욥입니다. 하여 사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하느님의 1차 시련의 시험을 통과한 욥입니다. 하느님은 눈이자 귀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침묵중에 사탄을 통해 일어나는 욥의 불행과 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이 되고 귀가 되어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보고 듣고 계십니다.
말그대로 욥의 믿음의 승리요 평소 쌓아온 믿음의 내공을 반영합니다. 모두를 다 잃었어도 찬미의 믿음이 있었기에 욥은 건강은 잃지 않았습니다.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욥의 믿음임을 짐작합니다. 우리 삶은 크고 작은 이런저런 시련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곧장 일어나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믿음을 배웁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났을 때 조용히 개입하셔서 제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제자들을, 아니 우리 인간 모두를 상징합니다.
아,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수도공동생활을 통해 저는 물론 형제들을 통해 날로 깨달아 가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상징하는 어린이는 ‘겸손’보다 ‘파견 받은 신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자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참으로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그러나 하느님께 파견 받은 인간존재의 대한 깊은 연민을 지닌 가난하고 겸손한 ‘가장 작은 이’가 정말 큰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믿음이요 예수님이 그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들이요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연민의 믿음과 더불어 예수님은 관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은 자기 우월감에 젖어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 편협한 제자들의 마음을 넓혀 주십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러합니다. 온전한 진리는 우리를 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하늘 나라를, 진리를 탐구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나라 건설에 누구든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계획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활짝 열린 넓고도 깊은 겸손한 자세의 관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인드를 지닌, 행동하는 믿음을 지닌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자 모두와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교황님입니다. 193개국이 모인 UN총회에 보낸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집인 지구의 더나은 미래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님과 욥은 정말 믿음의 대가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 악을 멀리하는 올곧고 흠없는 믿음, 연민과 관대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종으로서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사신 분들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