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5.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1요한3,11-21 요한1,43-51
형제애의 실천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주님의 진실하심, 세세에미치리라.”(시편100,5)
예전 10대말, 고등학교 시절 바둑을 좋아할 때 말그대로 침식(寢食)을 잊을 때가 많았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는 이를 미식가(美食家)라 한다면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를 미독가(美讀家)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저는 미식가는 전혀 아니지만 미독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침식을 잊을 정도의 독서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책읽을 때는 배고팠을 때 게걸린 듯 밥을 먹듯이 좋은 책을 읽을 때는 지금도 역시 배고팠을 때 음식을 먹듯 책들도 여러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전투하듯이 읽습니다.
지금도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지고 침식을 잊을 정도이지만 기도와 미사, 강론보다 엄중한 것은 없기에 절대로 독서나 그 무엇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바둑은 수도생활과 시간상 너무 아니기에 끊은지 오래지만 여전히 좋아하여 때로 애기가(愛棋家)로서 명국(名局)은 틈틈이 감상하곤 합니다. 아마 저의 기력은 아마 5단은 될 것입니다.
요즘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진리의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무수한 강론 글들을 보며 절절히 깨닫습니다. 어제도 미구에 있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이탈리아판 출간 소식을 듣고 원장에게 영문으로 출간되면 주문해달라 부탁했고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미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문판 서문을 읽었는데 정말 핵심을 꿰뚫는 명쾌한 내용의 명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의 신학에 정통한 프란치스코 교황인지! 그분의 엄청난 기억력과 총명함에 감탄했습니다. 95세로 선종하기 까지 베네딕도 교황의 의식도 매우 명료하고 투명했다 합니다.
곧 출간될 책 베네딕도 교황의 전기 영문판 제목부터 마음 설레게 합니다.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새롭다), 얼마나 멋집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문은 구구절절 감동의 명문이지만 몇구절만 인용하여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중에 신학을 한 분이시다(Benedict did theology on his knees in prayer)”
“하느님은 사랑의 한 사건이다(God is an event of love)”
“지상에서 사랑아닌 그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What on earth could save us if not love?)”
“성서와 교회 교부들에 바탕한 요셉 라칭거 사고의 깊이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도움이 된다(The depth of Joseph Razinger’s thought, based on Holy Scripture and Church Fathers is still helpful us today)”
“온교회가 그분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The whole Church will be forever grateful to him)”
“우리에게 베네딕도16세 교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하자(Let us thank God for having given us Pope Benedict)”
내용이 너무 감동스러워 독수리 타법으로 조각하듯 영문을 병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니 이게 진정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최고의 형제애는 형제자매들을 더욱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사랑입니다. 어제 저는 자매들의 격려 글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과찬의 메시지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대로 인용합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의 영적유언을 보면서 신부님 생각이 났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주시는 신부님 역시 교황님에 손색이 없으시니 존경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에겐 신부님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이지요! 신부님께서도 지금까지의 삶은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셨지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새삼 형제자매들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 진짜 형제애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갈망이, 염원이 잠재해 있습니다. 참평화, 참기쁨, 참행복도 이런 하느님 사랑에 있기 때문이요, 이런 행복은 사람 누구나의 근원적 소망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의 말씀 역시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요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형제 사랑에 투신하게 됩니다. 성인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할 일은 형제들을 주님께로 안내하는,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요한 세례자는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를 예수님께, 또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을 직접 부르셨지만 필립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 역시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녹녹치 않습니다. 전개되는 대화를 보십시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은 물론 그 누구도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참 힘들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란 말을 보니, 제 강론집 제본소 “와서”란 이름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다면 참 기막힌 발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직접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립이요, 아, 바로 이게 진정 형제애입니다. 이에 본격적 참사람들간의 운명적 만남이 펼쳐집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을 잘 아시는 주님이듯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세상에 예수님 CCTV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참자기를 발견함으로 경악한, 또 감격한 나타나엘의 예수님 고백입니다. 참사람과 참사람의 참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의 고백을 통해 자기 신원을 새롭게 확인한 예수님 역시 감격하여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고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관계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발광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성인들처럼 우리는 더욱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이웃 형제애의 실천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한 주님의 반사체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아멘.